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이다. 2009년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륵사는 익산 용화산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좌우 능선 사이에 평지에 남향을 향하여 건립되었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이 있고, 목탑이 있었던 터가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외에 무왕과 왕비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1] 현재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해체 복원 진행 중에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의 금마면 신룡리와 삼기면 연동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430m). 『세종실록지리지』(익산)에 "진산은 미륵이니, (중략) 미륵산 석성(속설에 전하기를, 기준이 처음으로 쌓았으므로 기준성(箕準城)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익산)에 '미륵사'와 '미륵산'이 기록되고 있어 미륵산 자락에 미륵사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지』(익산)에 '미륵산, 미륵사', 『여지도서』(익산)에 '미륵산, 기준성'이 표기되어 『해동지도』(익산)에 '미륵산, 미륵면' 등 지리지와 고지도에서의 기록으로 보아 미륵산 이라는 산 지명에서 '미륵면'이라는 면 지명이 파생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익산)의 미륵면에는 "미륵탑은 구원리에 있으며, (중략) 미륵산."이라는 기록에서 '미륵면'과 '미륵탑'을 확인할 수 있다.
미륵산은 금마에서 북쪽으로 8리 정도의 거리에 금마면, 삼기면, 낭산면에 걸쳐 있는 높이 430m의 산으로 옛날에는 이산의 동쪽에 이어져 있는 높이 350m정도의 낮은 산봉까지를 포함하여 용화산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구분하여 미륵사지가 있는 북쪽은 미륵산이라 하고 나머지 지역은 용화산이라 하고 있다. 미륵이나 용화는 모두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는 명칭으로써, 원래는 용화산이라 하던 것이 미륵사가 지어지면서 그 주변산만을 미륵산이라 칭한 것이라 보인다.
이 산은 천호산의 줄기가 동서로 가로질러 이룬 산으로 북으로는 황산벌이 보이고 남으로는 멀리 호남평야를 바라보는 평지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산에서 발원하는 도천, 부상천, 궁평천, 등은 만경강의 상류를 이루며, 서해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산의 최고봉을 운제봉이라 하고 조금 낮은 앞 산봉을 장군봉이라 하는데, 장군봉에는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은 모양으로 생긴 까닭에 투구 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바위가 있다. ‘여지승람’ 익산군 산천조에서는 “장군봉은 용화산에 있는데, 남쪽에 있는 바위에는 두어말의 기름을 녹일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이 바위를 등잔암이라 한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말하는 등잔암은 지금의 장군봉 산정에 있는 투구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의 남록에 있는 거북바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는 금마면 신용리 뒷산 미륵산 기슭에는 두 개의 자연석이 위아래로 포개져 있는 뜬 바위라는 돌이 있다. 거북바위에는 가로 70cm 세로50cm 정도의 구멍이 파여져 있다. 역사적으로 이 미륵산은 영산(靈山)으로 인식되어져 왔을 뿐만 아니라 풍수에서 강조하는 용맥(龍脈)이 백두대간을 거쳐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거쳐 금남정맥으로 독립하여 대둔산, 계룡산 방향으로 달리는 과정에 한 줄기가 서해 바다 쪽으로 뻗어나가다가 함열과 익산사이에서 크게 멈추는 곳이 바로 미륵산(용화산)으로 보았다.
미륵산은 금남정맥상의 운장산과 대둔산의 중간 부분에서 한줄기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가 맺힌 가장 큰 산이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내달려 오다가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멈춘 기운이 강하게 응결되어 근엄한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한없이 부드럽게 펼쳐지는 익산 구릉을 사방으로 지켜주고 있다. 미륵산골 5개 자연(현동 뒷산(안산), 축청마을 쌍갈뫼, 석불사거, 함라, 서해바다)마을에는 백두대간의 정기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18세기 이중환(1690-1752)이쓴 “택리지”에 보면 ‘미륵산(용화산)을 기준으로 하여 그 북서쪽에 여산이 있고, 그 서쪽으로는 용안, 함열 등이 있고, 동쪽으로는 고산현이, 남쪽으로는 익산군이 있다’라고 하고 있다. 즉 미륵산(용화산)을 인근일대의 중심산으로 보고 있다. 특히 미륵산을 중심으로 기준의 마한도읍설과, 백제무왕의 미륵사 창건 및 왕도설은 풍수에서의 진산의 의미를 상기 시킨다.
미륵산 안에는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사자암, 죽사(지금은 없다. 사자암 서쪽으로 백보거리에 있었음), 수백암(지금은 없음, 사자암남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영혈사( 지금은 없음. 수백암 북쪽으로 1리의 거리에 있었음), 명적암(지금은 없음, 사자암 동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천장암(지금은 없음), 명적암 (사자암 동쪽으로 2리 거리에 있었음), 심곡사(현존), 석불사, 태봉사, 장안사지 등 절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산은 백제, 신라, 고려 대를 이어 이 지역의 불교문호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위에는 기준성이라 불리우는 미륵산성터가 있으며, 중턱에는 백제의 도요지가 여러 곳에 있어 삼족토기 등 백제 토기를 이곳에서 구워냈음을 알 수 있다.
높이는 430m로, 원래 이름은 용화산 이었으나, 미륵사가 지어진 후부터 미륵산이라고 부른다. 또한 봉우리가 사자의 형상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한다. 마한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이곳에는 미륵산성이 축성되어 있는데, 성곽의 둘레가 1,822m이다.
미륵산성은 정상인 우제봉에서 동쪽으로 둘러 쌓았으며 성문에는 옹성을 설치하였다. 기름 한 말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큰 홈이 패인 등잔암 외에 4m의 높이에 구멍이 나 있는 투구바위, 안질에 좋다는 약수터, 사자암, 심곡사, 왕궁탑 등 명소와 볼거리가 많다.
명 칭 |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益山 蓮洞里 石造如來坐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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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등록)일 | ·1963.01.21 |
소 재 지 | ·전북 익산시 삼기면 진북로 273 (연동리) |
시 대 | ·백제 |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
관리자(관리단체) | ·익산시 |
명 칭 | ·연안이씨 종중 문적 (延安李氏 宗中 文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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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문서류/ 문서류 |
수량/면적 | ·일괄 |
지정(등록)일 | ·1979.02.08 |
소 재 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기양리)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연안이씨충간공종중 |
관리자(관리단체) | ·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
명 칭 | · 태봉사삼존석불 (胎峰寺三尊石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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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
수량/면적 | ·1기 |
지정(등록)일 | ·1971.12.02 |
소 재 지 |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496 |
시 대 | |
소유자(소유단체) | ·태봉사 |
관리자(관리단체) | ·태봉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