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 마을 입구에 위치에 있으며, 죽청제는 1935년도에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진 제라고 할 수 있다. 대판천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죽청제에서 상부막이, 중부막이, 하부막이를 만들어 물을 담수하여 활용하였고, 하부막이에 물뱅이를 만들어 죽청마을과 현동마을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는데 일제시대(1935년)에 만들어 부족한 물을 담수하여 농사에 활용 하였다. 또한 현동마을 앞 전·답이 대부분 죽청주민들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판천에서 흘러오는 물이담수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사료된다.
물뱅이 아래에는 물방아골 이라고 전해오는데 그곳에서 물레방앗간 있었으며, 주변 마을사람들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전·답은 주로 논농사와 잡곡를 재배하고 있다.
연동제
연동마을 입구에 위치에 있으면, 연동제는 1940년도에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진 제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연꽃이 자라고 있다.
석불사
석불사는 삼기면 연동리 산220번지의 낮은 구릉지대 능선 상에 위치하는 평지가람의 형태이다. 원래 대한불교화엄종의 사찰이었으나 현 주지인 정운 이석준 스님이 1994년 한국불교 화엄종 본산으로 종교단체 등록하였다.
석불사 대웅전은 1990년에 전면3칸 측면3칸으로서 익공식 구조로 신축되었다. 석불좌상은 보물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광배(光背)는 7세기에 만들어진 백제예술(百濟藝術)의 걸작이다.
석불좌상은 별석으로 된 좌대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데 상현좌를 하고 있다. 좌대의 크기는 전면 폭이 225㎝, 높이가 약 45㎝로 하면에는 10㎝가량의 돌대를 두고 있다. 광배의 좌대에는 가공된 지대석이 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석물좌대의 아래에도 이와 같은 지대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절단된 머리는 뒤에 만들어 붙였기 때문에 볼품이 없다. 그리고 몸 전채에서도 곳곳이 떨어져 나가 원형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어깨는 넓고 반듯하게 내려왔으나 강건한 작풍이며, 두 무릎을 넓게 펴서 안정감이 있다.
석불좌상의 머리에 얽힌 이야기다. 현재 석불사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석불좌상 머리를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머리가 없었던 불상에 새로 만들어 달았기 때문이다. 그 연유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진격하던 중 삼기면 근처에서 짙은 안개를 만나 발이 묶이게 된다. 낭패를 당한 왜장은 부하를 시켜 안개 속을 정찰하게 했고 아무 것도 없고 그저 불상 하나가 있더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불상이 원인이라고 짐작한 왜장은 불상을 찾아 단 칼에 목을 베어 버렸고 그러자 안개가 씻는 듯이 걷혔다고 한다. 그 후 제때 진격하지 못한 왜군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로, 연동리 석불좌상이 호국 석불이라 불린 이유가 되었다. 또한 현재까지도 그 영험함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도 전국에 화제가 된 땀 흘리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예로부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석불이 땀 흘려 예고한 일이 있었는데, 노무현대통령 서거당시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고 주지스님은 목격하였다고 한다.
태봉사
태봉사는 삼기면 연동리 496번지 죽청마을 태봉산(胎峰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불교 태고종에 속하는 사찰이다. 삼존석불은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백제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1957년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서 초익공 구조로 건립되었다. 안에는 삼존석불이 있으며 부채꼴의 큰 판석(板石)에 삼존불을 부조한 것이다. 중앙의 사각형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한 석가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연꽃가지를 쥐고 있는 문수보살입상이 위치해 있고, 왼쪽에는 감로수 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모든 불상 머리에는 둥그런 광배가 있다. 본존불의 높이는 0.68m이며 두 협시불(脇侍佛)의 높이는 0.77m, 광배의 높이는 2.12m이다. 이 불상은 백제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봉산은 마한의 기준(箕準)이 아들 3인을 얻고, 그 태를 묻었다 하여 붙여진 산명이라 한다. 기준은 이곳에서 기도하여 세 왕자를 얻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이 절에는 여승들만이 있어서 남승들의 출입은 엄금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사찰은 약 50년 전에 중창되었다. 중창주인 심묘련(深妙蓮)보살은 삼대독자인 아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산신기도를 드리다가 산신의 현몽으로 아미타삼존석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사찰을 중창하였으며, 산 이름을 따서 태봉사라 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極樂殿)·산신각(山神閣)·요사채 등이 있다. 특히, 이 불상은 아들을 점지하는 영험이 있다고 하여 지금도 득남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외에도 6∼7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중국의 청동거울이 발굴되어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근래에 조성된 운공당대조사탑과 청신녀(淸信女) 청송심씨 묘련화공덕비, 5층석탑 등이 남아 있다. 지금의 주지인 혜안은 무형문화재 영산회상작법 전수자로 지정되어 있다.
태봉사의 유래
태봉산은 삼기면 연동리 산150번지 일대 연동마을 뒷산이다. 익산은 기자조선 준왕이 위만의 난을 맞아 수많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들어온 지역이라고 하는 사실을 문헌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많은 준왕 관련전설이 채록되고 있는 지역이다. 전설에 의하면 익산에 온 준왕이 남하해 현재 금마에 새나라를 열었고, 아들을 바라자 현몽이 나타나 태봉산에 움막을 짓고 기도를 하게 된다. 그 후 기준왕이 세 아들이 생겼고 그 세 아들의 태를 봉우리에 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봉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치마바위
치마바위 대동여지도에는 미륵산 북서쪽 329m 높이에 있으며, 치마바위의 높이는 40m 폭은 50m의 화강암질로 되어 있다.
바위로서 치마를 두룬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불리고 있으며, 또한 암벽바위 모습이 장군이 말타고 미륵산(용화산)장군봉을 향해 달리던 장군의 의복과 흡사하다 하여 치마암(馳馬岩)이라 하였는데 오늘날 치마바위라 불리우고 농경문화를 일구어 오는 우리 조상들이 야간에 불공을 드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미륵산(금마)일대에는 마한, 백제시대의 중심지로 미륵산성, 미륵사터, 사자암등 유물 유적의 흔적으로 이지역이 와도에 준하는 중심지임을 반증한다. 현재는 클라이밍 동호회의 기초 암벽 장으로 기초훈련장으로 많이 이용한다. 산악자전거 동호회의 코스와 패러글라이딩 동호회의 활강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동사
현동사는 삼기면 기산리 332-1번지 현동마을에 있다. 원래 충간공(忠簡公)이숭원의 위패와 성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영정(影幀)·어서(御書)·교지(敎旨)·공신회맹록(功臣會盟錄)등이 사손이 살던 서울 명례방의 종가 부조묘(不祧 廟)에 봉안되었다가 중종조(中宗朝)에 성지로 어서각(御書閣)과 영당(影堂)이 건립되어 그곳에 이안(移安)되었다.
종가가 쇠잔하여 향화(香火)마저 끊어지게 되자 선조조(宣祖朝)에 익산에 살던 종통(宗統)을 이은 충남(忠男)의 집 오룡산(五龍山) 구문천리(九文川里)에 봉송(奉送)되어 봉안하였다.
정순조(正純祖)년간에 공의 6대손 택(澤)이 현동에 이거 하면서 다시 격식을 차려 어서각·영당·부조묘를 세우고 이곳에 봉안하였다. 1808년 순조(純祖)8년에 이곳 유림들이 영당에 현동사라 편액하고 향사하게 되었다. 그 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영당이 훼철되고, 어서각, 홍살문과 하마비만 남게 되었다.
1979년 2월 8일 충간공의 영정, 어서, 공신회맹록, 교지 등이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사우와 어서각 및 부속건물이 신축되었다. 2008년12월 국가문화재청으로부터 유물전시관이 승인되어, 2010년도에 문화재청, 전라북도, 익산시의 지원을 받아 보물 제651호 연안이씨종중문적 박물관으로 건립되었다.
충간공(忠簡公) 이숭원(李崇元)
이숭원(1428∼1491)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인(仲仁),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참판 보정(補丁)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의 증광시에 문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주부가 되고 사간원정언을 거쳐 1459년(세조 5)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이후 형조정랑, 이조정랑·세자문학·성균관사예·중서사인(中書舍人)·사헌부집의를 거쳐 1468년 장례원판결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동부승지, 좌승지가 되었다.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다. 이후 도승지, 형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1485년(성종 16) 우참찬이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좌참찬이 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1489년(성종 20) 다시 형조판서를 지낸 뒤 1491년(성종 22) 병조판서로 있다가 향년 64세로 졸하였다.
선생은 경학에 통달하고 지덕을 겸비하였으며, 관직에 있으면서는 청렴과 선정을 베풀어 숭앙을 받았다. 또한 현귀(顯貴)하게 됨으로 인하여 증조 이하 3세가 모두 봉군(封君)되고 판서에 추증되어 가문을 빛내고 사후에는 충간(忠簡)이란 시호와 부조묘의 특전이 내렸다. 그 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천되고 어서각의 편액을 하사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