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골은 금마에서 북쪽으로 8리 정도 위치에 있다.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이 등제되어 있는 2000년 유구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고장이다.
익산은 마한·백제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다.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모서리를 받쳐줄 많은 유물·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여
오늘이라도 자신들이 간직한 내력을 밝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익산은 전라북도 북서부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금강 줄기를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부여군 및 논산시와, 남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김제시와 닿아 있다.
사방이 평야로 둘러싸여 드나들기가 편리한 까닭에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로 들어서는 초입이 된다.
호남선이나 전라선 열차를 타면 충청남도 강경을 지나 익산 땅에 들어서고 호남고속도로를 통하더라도 충청남도 논산을 지나
익산시 여산면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동남쪽으로는 전북평야, 서남쪽으로는 군산시의 임옥평야, 서북쪽으로는 충청남도
논산시의 강경평야와 닿아 있는 익산 땅은 전라북도에서 김제시 다음으로 경지율이 높고 쌀 생산량이 많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금강과 만경강 덕분에 수로교통이 편리하여 신석기 시대 이래 농경문화가 번창했고, 삼한 시대로부터 여러 시대에
걸쳐 인근 지역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삼한 시대에 기자의 41대손인 기준은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금마 땅에 이르러 마한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건마국(乾馬國)이었다. 그후 백제의 시조 온조는 마한을 병합한 후 이곳을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던 600년 무렵, 무왕은 금마저를 도성으로 삼고 미륵사, 제석사와 같은 거대 사찰과 왕궁평성을 쌓았다.
이를 근거로 백제가 금마 지역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나, 또 한편으로는 사비성, 웅진성과 함께 이곳을 별도(別都)로 경영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가 망한 후 그 역사 기록이 철저히 인멸되었고, 남아 있는 기록조차 단편적인 까닭에 사료를 통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결과로 백제 중엽 이래 이 지역이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문화의 또 하나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그 후 통일신라 문무왕 때는 이 곳에 고구려 유민 안승의 보덕국이 있었으며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왕 견훤의 세력이 이 땅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금마 땅에는 마한과 백제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을 뿐더러 익산토성, 미륵산성, 낭산산성, 왕궁평성 등 고대 국가의 성터들이 흩어져 있다.
또 미륵사터, 왕궁리 오층석탑, 쌍릉, 동고도리 석불입상, 태봉사 삼존석불, 연동리 석불좌상 등 유물·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이곳에 터를 닦고 경륜을 펴려던 옛 사람들의 자취를 증언해준다. 이처럼 한 지역에 유적·유물이 밀집된 것은 경주나 부여 등
어느 왕도에서나 볼 수 있는 일로, 이 지역이 왕도에 준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다시금 반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