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기면(三箕面)은 마한 땅인데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합병하여 금마저(金馬渚)라 하다가 신라 경 덕왕(景德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전주에 속하였다가 충혜왕(忠惠王) 후 5년(1344)에 익주(益州)로 승격하였다.
조선조 태종(太宗) 13년에 익산군(益山郡)이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팔봉동, 북으로는 낭산면에 둘러싸여 있다. 특히 동쪽으로 금마면 기양리에 접해있으며 미륵산의 서쪽 능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마한백제 시대의 중심지인 금마저의 외곽 마을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율촌면( 栗村面), 사제면(巳梯面) 일부를 편입하고, 1910년 3개면(율촌면, 사제면, 구 문천면(九文川面))을 합해져서 이곳에 있는 삼기산(三箕山)에서 이름을 따서 삼기면(三箕面)이라 칭하였다. 원래 삼기산 이란 명칭은 미륵산(彌勒山)과 대비에서 생긴 말로 미륵산이 너무나도 우람하고 높은데 비해서 삼기산은 초라하고 작은 새끼산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삿기메” (작은 산이라는 뜻)가“셋기메로 변하여 샛끼뫼가 음변에 의해서 “새끼메”가 되고 다시 변하여 “세(三) 기(箕) 뫼(山)”, 즉 삼기산(三箕山)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 율촌면이 서두리(西豆里)로, 전 사제면이 간촌리(間村里)·용연리 (龍淵里)로, 전 구문천면이 기산리(箕山里)·오룡리(五龍里)·연동리(連洞里)로 변경 되었고, 1985년 이후로 3개 분리(석불, 옥실, 상정)가 승격되어 현재 27개 분리로 되어있고, 1995년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어 익산시로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현동마을은 가므골 이라고도 한다. 1972년 현동과 득록동(得錄洞)을 병합하여 한 동네가 되었다.
250여년 전에 연안이씨가 도마리에서 이사와 살기 전에도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현동의 본 이름은 “갊은골(蔣洞)”, 또는 “감은골(玄洞)”이라 불리우는데 마을이 숲 속 안옥한 곳에 자리했기에 일컬어지는 이름이다. 마을 뒷산(안산)을 가리켜 “용마혈(말이 뛰어가는 형국)”이라 부르고 있으며, “음수골”(옴수골)과 “똥메(통메)”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각각 말이 물을 먹는 자리, 말의
밥그릇 자리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연안이씨의 현동사와 어서각(御書閣), 보물 제651호 연안이씨종중문적 박물관이 있으며, 조선조 말을 장식하는 대 유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묘소와 현산재(玄山齎) 재각이 있다.
기산리 중심의 동쪽위치에 있으며, 4월 현재 총 52세대에 100명(남자 58명, 여자 4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지하수, 천수작 위주의 벼농사가 주요 산업이며, 딸기, 고구마, 콩, 참깨, 들깨 등 밭작물도 있다.
마을 앞도로는 미륵사지로 좌측 도로는 718번 도로 함열 방향으로 이어지고, 우측 도로는 미륵사지로 이어지는 722번 도로
금마방향으로 연결된 도로가 있어서 교통은 편리하다.
득록동(골)은 충간공(忠簡公) 이숭원(李崇元)이 임금을 보필하여 정사를 잘 보았다는 공훈으로 조선 성종(成宗)3년 (1472)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 되었다. 이때에 노비와 전토 그리고 마필 등 많은 록을 하사받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록을 받은 동네라는 뜻으로 한자음 표기로 득록동(得錄洞)이라 하였다. 득록동은 기산리 중심지역에서 북쪽 방향에 위치해 있으며, 2016년 4월 현재 총 14세대에 32명(남자 17명, 여자 15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수도작 위주의 벼농사가 주요 산업이며, 고구마, 참깨 등 밭작물도 있다.
득록동은 삼기농공단지가 1989년 6월에 조성되어 있어, 많은 기업이 입주해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마을 앞도로는 미륵사지로로 좌측 도로는 718번 도로 함열 방향으로 이어지고, 우측 도로는 미륵사지로 이어지는 722번 도로
금마방향으로 연결된 도로가 있고, 호남고속도로 익산 IC 7㎞, 호남고속철도 익산역 14㎞, 군산항 30㎞ 에 위치해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죽청마을은 대판이 라고도 한다. 원래 대판이라 하였는데 대판이란 대밭이 넓고 많다는 뜻이기 때문에 온 동네가 파랗다 하여 “대파라니”라 한 것을 한자음 표기로 바꾸면서 “죽청(竹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옆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 “큰골(大谷)”이 있어서 대판(大場)이라 했다 한다.
마을은 250여년 전 부터 나주임씨(羅州林氏)와 달성서씨(達成徐氏)가 살았었고 뒤이어서 연안이씨(延安李氏)가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미륵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죽청천은 남·북으로 갈라놓은 듯 양쪽으로 분리되어 위뜸, 아래뜸, 양지뜸, 음지뜸으로 지명이 불린 마을이다.
미륵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을 이용하여 옛날부터 선조들이 상부막이, 중부막이, 하부막이를 설치하여 죽청마을과 현동마을에 농사를 지었을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물뱅이를 만들어 죽청 마을과 현동마을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 물의 일부는 현동 마을 앞 야산을 깎아 죽청제(竹淸堤:1935년)를 만들게 하였고, 그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생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죽청마을은 연동리 중심지에서 동쪽 방향에 위치에 있으며, 2016년 4월 현재 총 33세대에 97명(남자 68명, 여자2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벼농사와 논을 이용하여 하우스에서 채소작물과 고구마 종순으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나훈아의 <고향역> 작사·작곡 임종수 선생의 생가, 미륵산 자연학교, 마을에서 운영하는 농촌 체험장 등이 있어 1박2일 가족단위 휴양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마을이다.
장항동마을은 노루목 이라고도 한다. 지형이 노루의 목과 같이 좁고 길게 뻗어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노루목”이라 한다. 이를 한자음 표기로 바꾸면서 긴 목이라는 뜻으로 장항(長項)이라 표기 하였다. 장항동(獐項洞)은 사람들이 장항동(長項洞)과 음이 같기 때문에 혼동해서 쓴 것이다.
마을은 연동리의 동쪽 미륵산 아래 처음 맞이하는 위치에 있으며, 2016년 4월 현재 총 9세대에 20명(남자 9명, 여자 1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시골 다랭이 논과 밭을 이용하여 벼농사와 잡곡을 재배하고 있다.
미륵산 풍치와 깊은 계곡은 무속인 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정상의 발원지를 시작으로 맑은 계곡물이 합하여 죽청천을 형성하면서 금강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계곡 주변의 장관을 찾아 물놀이를 하곤 한다. 1980년대에는 엘리사 기도원이 있어 전국 기독교인들이 찾아 마을 산속 군데군데 텐트를 치고 야영하며 연수 받던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현재는 연수원은 사라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석불마을은 석불리(石佛里)로 백제시대에 축조 된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불마을은 연동리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총 49세대에 92명(남자 45명, 여자 47명)이 살고 있고 있으며, 수도작 벼농사가
주요산업이며, 고구마, 묘목 재배 등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석불초등학교가 있다.
마을 중앙에는 보물 제45호인 석불좌상이 있는 석불사가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 도로는 718번 도로와 미륵사지로 도로와 교차로로 좌측 방향은 함열 방향으로 이어지고, 우측 방향은 미륵사지로로
이어지는 722번 도로 금마방향으로 연결 되고, 북측방향으로는 718번 도로 강경방향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이어지는 718번 삼기방향으로 연결된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연동마을은 “연이 많은 저수지가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연등동제(蓮等洞堤 ,蓮等堤)가 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연등동(蓮等洞)은 “연들골”이란 우리말을 이두식(吏讀式)으로 표기한 말이다. 원연동(元蓮洞) 1972년 연동과 석불리를 병합하여 연동이라 하였기 때문에 병합되기 전의 연동을 원연동이라 한다.
연동마을은 연동리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2016년 4월 현재 총 42세대에 80명(남자 37명, 여자 47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연동제(蓮洞堤:1940년 완성)를 이용하여 수도작 위주의 벼농사, 고구마 종순 재배가 주요 산업이다.
마을 뒷산은 태봉산(胎峰山)이 우뚝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북쪽 아래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태봉사(胎峰寺)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에는 연동보건소가 있다. 1940년대 완성된 연동제(蓮洞堤)가 남쪽 길 건너 위치해 있는데 그 곳에서 연이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여름철 연꽃이 피면 그윽한 향기와 자태가 마을을 아름답게 수놓을 정도다.
마을앞 도로는 미륵사지로로 좌측 도로는 718번 도로 함열 방향으로 이어지고, 우측 도로는 미륵사지로로 이어지는 722번 도로 금마방향으로 연결되고, 북측방향으로는 718번 도로 강경방향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이어지는 718번 삼기방향으로 연결된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채산마을은 작은뜸 · 큰뜸이라고도 한다. 160여년 전에도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와 초계정씨(草溪鄭氏)가 살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형이 “금채낙지형(金釵落地形), 즉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의 명당이라 하여 채산(釵山)이라 쓰다가 “비녀채(釵)”자가 잘 쓰이지 않은 자이기에 잘 알고 있는(彩山)으로 바뀐 것이다.
마을은 연동리 중심지에서 북쪽 방향에 위치해 있으며, 2016년 4월 현재 총 48세대에 102명(남자 55명, 여자 4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논을 이용하여 하우스에서 고구마 종순으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삼기면에서 경작 규모가 1등으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마을 이다.
마을 앞에는 2011년 9월에 조성된 익산일반산업단지가 위치해 있고, 718번 도로는 익산시 영등동으로 이어지는 하나로 도로가 연결되어 편리한 교통망이 형성되어져 있다.